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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이아, 빛으로 피어난 이야기] 53. 부른 이름, 돌아온 대답 - 상속포기와 상속권 상실 선고 청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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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10-16

본문

나는 누구하나 제대로

품어 살리지도 못하고

가슴만 크게 다쳤다

(...)

깊이 다친 가슴을 문지르며

고개 숙여 가을 길을 걷는다


- 박노해,  <다친 가슴으로> 중에서






주소 없이 시작한 소송

52화에서 말씀드린 상속권 상실 청구 소장을 법원에 냈습니다.


소장에는 상대방의 주소를 적어야 합니다. 소송은 원칙적으로 상대방이 사는 곳의 법원에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 주소를 알지 못했습니다. 마흔 해 가까이 소식 한 번 오가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래도 길은 있습니다. 주소불명으로 적어 일단 소를 내면, 법원이 주소를 보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이 있으면 상대방의 주민등록초본을 뗄 수 있습니다. 한 번 돌아가는 만큼 시간은 조금 더 걸립니다.


소장을 낸 지 사흘 만에 주소보정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유족이 짐작하던 동네와는 달리, 초본에 적힌 상대방의 주소는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제 사건을 그분이 사는 곳의 법원으로 옮겨 달라고 신청할 차례였습니다.   


법원보다 먼저 

지난 글 끝에 “저는 할 수 있는 한 이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다”라고 적었습니다. 사건을 옮기면, 그분은 결국 법원이 보낸 서류로 이 모든 일을 처음 알게 될 터였습니다. 그것이 가장 빠른 길도, 가장 나은 길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송신청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법원의 공식 송달보다 먼저, 제가 직접 소식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주소를 확인한 그날 바로 내용증명을 썼습니다. 소장을 받고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되시는 것보다 미리 알려 드리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이 글을 보낸다고. 그리고 소송까지 가지 않고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닿기를 바라며 익일특급으로 부쳤습니다.   


두 번째 배달

다음 날 우체국 알림이 왔습니다. "폐문부재". 주소는 맞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 뿐이었습니다.


이튿날, 전날 알림이 왔던 시각이 지나도 휴대전화는 조용했습니다.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 껐습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짧은 알림이 떴습니다. “본인 수령”


마침내 연결

십 분 뒤,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떴습니다.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방의 머뭇거림이 느껴졌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몇 번을 멈칫한 끝에 겨우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지금 보내주신 서류를 받았는데요. 다른 건 다 그렇고⋯ 사망 경위가 무엇이에요?”


첫 질문이 상속분에 대한 것도, 제기되었다는 소송에 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흔 해 가까이 보지 못한 자식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그분이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건 그것이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저는, 이분이 상속을 포기하시겠구나 직감했습니다.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떠난 경위를 처음부터 천천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게를 꾸려 왔는지도. 중간중간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끊겼고, 저는 그 침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분이 말을 이었습니다.

“제가 다섯 살 때 이후로 키우지를 않아서⋯ 자격도 없고, 욕심도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될까요?”


긴 통화였습니다. 그 끝에서 그분은 유족이 가게를 이어 갈 수 있도록 상속포기에 협조하겠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기 직전, 그분이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 가게⋯ 주소를 좀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분이 바란 것은 자식이 남긴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이 오랜 시간 하루하루를 보낸 그곳을, 멀리서나마 한 번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사는 곳이 멀고 꾸려 온 다른 삶도 있어 당장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꼭 가 보겠다고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전화를 끊고도 저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상속포기

상속포기는 말 한마디나 각서 한 장으로 되지 않습니다. 중대한 권리를 내려놓는 일인 만큼, 가정법원에 심판을 청구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효력이 생깁니다.


통화 내내 저는 그분이 법원에서 오는 서류를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분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분께 알아서 하시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실 유족과는 미리 이야기해 둔 것이 있었습니다. 혹시 상대방이 상속포기에 협조한다면, 그 절차가 막힘없이 이어지도록 제가 돕겠다고. 이 사건을 가장 빨리 끝낼 수 있는 순간이, 마침내 왔습니다.


남은 소송

그렇다면 이미 제기한 상속권 상실 소송은 어떻게 될까요.

이 제도는 자녀를 돌보지 않았던 부모가 자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나타나 재산을 요구하는 일을 막으려고 만들어졌습니다. 법이 염두에 둔 사람은 ‘상속권을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상대방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내려놓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송은 이제 의미가 없을까요. 상속포기와 상속권 상실 선고의 효과가 같다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둘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국민연금의 수급권자 자격이 그렇습니다. 국민연금의 유족 급여는 상속재산이 아니라 유족에게 직접 주어지는 권리라서, 상속을 포기하더라도 유족이라면 여전히 수급권자가 됩니다. 반면 상속권 상실 선고가 확정된 사람은 수급권자에서 빠지도록 법이 정하고 있습니다. 고인의 죽음을 둘러싼 법적 문제를 한 번에 정리하려면, 상속포기와 별개로 상속권 상실 선고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제도로는요. 그런데 상속을 포기해 처음부터 상속인이 아니게 된 사람에게 법원이 다시 상속권 상실을 선고할 수 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사람은 ‘피고’라는 이름으로 소송을 계속 견뎌야 하고, 유족은 다툼이 사라진 상대를 상대로 소송을 이어 가야 합니다. 양쪽 모두에게 가혹한 일입니다. 상속을 포기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다른 권리까지 함께 내려놓을 수 있는 간명한 길이 필요합니다. 제도는 다툼을 정리하라고 있는 것이지, 다툼이 끝난 자리에 소송을 남겨 두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그분의 주소를 알아낸 그날 서둘러 사건을 이송했다면, 그분은 ‘피고’라는 이름이 적힌 소장으로 자식의 죽음을 처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소송에 대응하기 위하여 답변서를 쓰고, 어쩌면 변호사를 찾고, 법정에서 유족과 마주 앉았을지도 모릅니다. 상속권이 없어진다는 결론은 같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는 동안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법은 옳고 그름을 가려 줍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일은 옳고 그름만으로 끝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소장보다 먼저 건네는 한 통의 소식, 판결보다 먼저 나누는 한 번의 대화. 돌아가는 길처럼 보여도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일 때가 많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사건이 그랬습니다.


언젠가 수백 킬로미터를 건너온 한 사람이, 자식이 하루하루를 보냈던 가게 앞에 잠시 서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그 가게의 문이 열려 있기를, 그 안에서 유족이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고인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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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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