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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1본문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삣주삣 흩날리는
진눈깨지는 되지 말자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중에서
화해권고결정문
그분은 사업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거래처 중 하나가 매출의 반을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는데, 3년 전부터 그 거래처의 사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대금 지급이 한 달, 두 달 늦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끊겼습니다. 거래처 담당자는 곧 정리될 거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그 말은 1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해 결국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은 해를 넘겼고 화해권고결정문을 받았습니다. 미수금 전부를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5억 원이라는 금액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이 결정문을 근거로 강제집행을 준비했습니다. 집행권원을 손에 쥐었으니, 이제 받을 일만 남았으니까요.
흉흉한 소문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거래처가 파산을 신청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업계 안에서 돌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거래처와 거래하던 다른 업체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말이 오갔습니다. 막상 재산 상태를 알아보니, 거래처 명의로 된 부동산도, 의미 있는 예금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사업 규모가 컸던 만큼 채권자도 그분 한 사람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채권자가 동시에 독촉하는 가운데, 거래처는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무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대표는 연락이 잘 닿지 않았습니다.
파산선고 통지서
그러던 어느 날, 법원에서 서류가 도착했습니다. 거래처에 대한 파산선고였습니다. 파산관재인이 선임되었다는 통지와 함께, 정해진 기간 내에 파산채권을 신고하라는 안내문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용어들이 빽빽한 서류 앞에서, 그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늠이 안 됐습니다. 신고 기한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채권신고를 하는 일
그분은 다행히 화해권고결정문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명백한 집행권원이 있으면 파산채권자임을 입증하는 절차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채권 금액을 정확히 적어 채권신고서를 작성하고, 결정문 사본을 첨부하여 법원에 제출하면 됩니다. 만약 이런 문서가 없었다면, 계약서와 세금계산서, 입금 내역, 거래 장부, 확약서 등 채권의 존재와 액수를 뒷받침할 자료를 처음부터 하나씩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분의 경우는 소송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결과가 도움이 된 셈이었습니다.
채권신고가 누락되거나 기한을 넘기면 배당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어, 신고서 작성은 형식이 단순해 보여도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닙니다. 신고를 마친 뒤에는 파산관재인이 채권의 존부와 액수를 조사하는 절차가 이어지고, 이의가 없으면 그대로 확정됩니다.
994명의 채권자
회생과 파산은 다릅니다. 회생은 회사를 살려서 계속 운영하게 하는 절차이고, 파산은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나누는 절차, 흔히 말하는 빚잔치입니다. 이 사건의 채권자는 994명에 이르렀습니다. 담보도 연대보증인도 없는 일반 채권자인 그분은 채권자평등의 원칙에 따라 각자의 채권액에 비례하여 배당을 받습니다. 파산신청까지 이른 회사에 재산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파산재단이 파산관재인 보수 등 업무 진행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경우, 일반 채권자들에게는 사실상 한 푼도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께는 절차는 절차대로 진행하겠지만,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살아남는 권리
회사 간 거래는 종류와 규모가 다양합니다. 위험이 큰 거래라면 저당권이나 질권, 양도담보 같은 형태로 담보를 받아두는 것이 당연하지만, 소액으로 자주 발생하는 거래마다 담보를 요구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거래 초반에 담보를 요구하면 상대를 의심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거래 규모가 작다면 부동산 담보 대신 보증보험에 가입하게 하거나, 선급금 비율을 높여 미수금 자체를 줄이는 방법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처럼 거래처에 문제가 생기면, 결국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담보권뿐입니다. 파산선고가 내려지면 일반 채권자가 개별적으로 진행하던 강제집행은 모두 중지되고, 파산절차 안으로 흡수됩니다. 집행권원이 있던 그분의 강제집행 역시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단독으로 진행할 수 없게 됩니다. 반면 담보권을 가진 채권자는 다릅니다. 채무자회생법은 이를 별제권이라 부르는데, 별제권자는 파산절차 밖에서 자신의 담보권을 개별적으로 행사할 수 있고, 채권신고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담보로 잡아둔 부동산이나 동산을 그대로 경매에 부쳐 우선 회수하면 그뿐입니다. 같은 거래처를 상대로 거래했더라도, 담보를 잡아둔 쪽과 잡아두지 못한 쪽의 운명은 파산선고 순간에는 완전히 갈립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994명이라는 숫자 앞에서,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습니다. 절차는 절차대로 밟아 가시되, 큰 기대는 내려놓으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화해권고결정문을 받아 두었던 것으로도 받을 가능성이 적은 돈 앞에서 최소한의 자리는 지킨 것이었지만, 담보가 있었으면 보다 더 확실하게 권리를 지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더해졌습니다. 거래처와 거래를 앞두고 있는 사장님들께, 혹시 모를 미수채권에 대한 담보를 미리 확보하시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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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