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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1본문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중략)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중에서
돈을 갚으려 하는데요
제 브런치 글 중 “24. 제주에서 빌려준 천만 원, 29. 결국 형사사건까지 왔습니다”를 기억하시나요?
의뢰인분은 상대방에게 천만 원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여, 대여금 소송을 제기하였고 상대방의 항소로 2심까지 가서야 결론이 났습니다. 이후, 강제집행을 하려고 보니 상대방이 유일한 재산을 아들 명의로 가등기한 것이 드러나서, 사해행위취소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또한 상대방의 항소로 현재 2심 진행 중입니다. 계속되는 상대방의 책임회피로 인해 결국에는 강제집행면탈죄로 형사고소를 진행하였습니다.
형사고소장을 제출하고 두 달이 지난 시점에서 피고소인이자 채무자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경찰조사를 앞둔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돈을 변제하겠다고 말입니다. 지난 3년간 꼼짝하지 않았던 분이었는데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오라고 한 한마디가 그분을 움직였나 봅니다. 가만히 말씀을 들어보니, “돈을 갚기는 할 건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다 갚을 수는 없는데 일부만 받고 민·형사 모두 정리해 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였습니다. 채무자가 돈을 갚겠다고 한 것은 저희 의뢰인에게 반가운 소식이지만 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지요. 저는 의뢰인께 말씀을 전했습니다.
택도 없는 소리네요
의뢰인의 대답이었습니다. 지난 3년간 이 사안 때문에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서 정신적 손해배상까지 청구할 마당인데 일부를 깎아 달라니요. 게다가, 사건 초반부터 상대방 태도가 도저히 용납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상대방은 차용을 인정하지 않고 증여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증여의 사유가 저희 의뢰인분이 본인에게 저지른 불법행위를 무마하는 대가로, 즉, 보상차원에서 줬다는 겁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던 상대방의 말을 믿고 좋은 마음으로 돈을 빌려준 대가가 이렇게 모욕스럽고 치욕스럽게 돌아온 것. 그것이 그분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의뢰인분의 결정도 이해가 됩니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인해 불쾌한 감정을 오랜 기간 홀로 감내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래도 돈 갚겠다고 하니 대승적인 결단을 내려달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분쟁은 알아서 지나가지 않습니다
법적 분쟁과 교통사고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발생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고 이후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 이후는 어떤 태도로, 어떤 말로, 어떤 행동으로 사건을 다루었느냐에 따라 경로가 달라집니다. 조기에 봉합될 수도 있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상대방이 초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변제 의사를 밝혔다면 분쟁은 훨씬 일찍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3년을 버텼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고, 문자는 무시하고, 내용증명에 대한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그 3년 동안 의뢰인의 마음에는 상처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뒤늦게, 그것도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오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채권자에게 연락한 듯한 이 상황에서, 합의를 위한 신뢰를 다시 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합의는 결국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모든 것은 지나간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많은 경우에 맞습니다. 하지만 법적 분쟁에서는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분쟁을 방치한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 아니라, 상처가 더 깊어지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오래 두면 둘수록 탈출구는 좁아집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