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최고관리자 작성일26-08-21본문
누가 홀로 가는가
함께 사는 세상에서
누가 함께 가는가
홀로 가는 인생에서
- 박노해, <누가 홀로 가는가> 중에서
출국을 일주일 앞두고
미국 국적의 한국인 노부부가 찾아오셨습니다. 두 분은 젊은 시절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서울에 남겨둔 아파트 한 채만은 팔지 않고 20년째 갖고 계셨습니다. 최근에야 그 아파트를 정리했는데, 정작 손에 쥐어야 할 돈의 상당액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작 저를 조급하게 만든 것은 두 분이 꺼내신 비행기 티켓이었습니다. 상담일로부터 일주일 가량 남은 날짜의, 미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이었습니다. 이제 막 벌어진 일들을 어찌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남겨두고, 며칠 후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부터 그분들이 가져온 서류보다 일정을 체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을 떠나기 전 남은 일주일 안에 무엇을 시작할 수 있는지부터 확인했습니다. 법적 다툼은 보통이 몇 달,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이었습니다.
20년을 믿고 맡긴 조카
부부는 그 아파트를 아내 쪽 친정 조카에게 맡겨 관리해 왔습니다. 세입자를 들이는 일도, 세금을 내는 일도, 이번 매매까지도요. 위임장이나 위임계약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가족으로 지내온 사이여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아파트는 15억 원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명의의 국내 계좌가 없다 보니, 계약금부터 잔금까지 매매대금 전액이 조카의 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잔금을 치르던 날 중개사무소에서 그분들에게 직접 받을 계좌가 없는지 물었다고 하지만, 그분들은 조카가 외국인은 국내에 계좌를 만들 수 없다는 말만 믿고 있었습니다. 조카는 세금과 각종 비용을 정산한 뒤, 원래대로라면 그분들에게 7억 원 가까운 돈을 돌려드렸어야 했습니다.
"이미 드린 게 전부입니다"
돌아온 돈은 5억 원뿐이었습니다. 나머지 2억 원을 요구하자, 조카는 처음엔 돌려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다 태도를 바꿔, 자신에게 1억 원을 인정해 주면 그때 나머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이모, 이모부라 부르며 지내온 사이였지만, 그분들이 거듭 요청할 때마다 조카는 미안하다는 말도,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도 없이 반환을 거절했습니다.
처음에 조카의 언행이 현실인지도 헷갈렸습니다.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이 이렇게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습니다.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우선 경찰서를 찾아 형사 고소를 접수한 뒤 저를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사흘 안에 시작된 세 개의 절차
제가 사건을 맡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건 분석이 아니었습니다. 담당 경찰서에 여러 차례 연락해 사건의 급박한 사정을 설명하고, 고소인 조사 일정을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통상이라면 몇 주가 걸릴 수도 있는 일정이었지만, 거듭된 요청 끝에 사흘 뒤로 날짜를 받아냈습니다.
조사 일정을 확보한 그날, 저는 또 하나의 절차에 착수했습니다. 조카는 이미 형사 고소가 접수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 명의의 계좌를 그대로 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조카 명의로 등기된 부동산은 어디에도 없었고, 살고 있는 집조차 남의 명의였습니다. 사실상 조카에게 남은 재산이라고는 매매대금이 지급된 예금계좌 하나뿐이었습니다. 가압류를 진행하겠다고 말씀드린 지 정확히 24시간 만에 신청서를 접수했습니다.
가압류 접수 다음 날에는 고소인 조사를 대비한 고소보충의견서를 작성해 담당 수사관님께 먼저 전달했고, 같은 날 민사 소장도 함께 접수했습니다.
그렇게 그분들이 한국을 떠나시기 전에, 세 갈래의 절차 모두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눈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고소장 한 장
고소인 조사가 있던 날, 저는 그분들과 함께 조사실에 들어갔습니다. 담당 수사관님께 사건의 자초지종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드렸습니다. 그날 확인한 고소장 원본은 그분들이 직접 손으로 눌러쓴 한 장 짜리 서면이었고, 첨부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20년의 신뢰가 무너진 사정을 낯선 법률 용어와 서류 양식 안에 담아내는 일은, 당사자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두 시간 넘는 진술을 마치고 나오신 두 분의 얼굴은 억울함이 다 풀린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적어도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조카를 직접 조사하시게 될 수사관님 앞에서 말할 기회는 가졌다는 안도감이 느껴졌습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이 사건에서는 사건 분석도 물론 중요했지만, 그보다 앞선 것은 속도였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이 사건이 언제 끝날지보다, 자신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무언가 시작되었다는 확인이 더 절실했을 것입니다. 경찰서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오는 것, 통장 하나가 함부로 비워지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 그 정도라도 눈으로 보고 비행기에 오르시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흘 만에 조사 일정을 받아냈고, 같은 주에 가압류와 민사소송을 함께 접수했습니다.
사건은 이제 시작입니다. 형사 절차의 결과도, 민사소송의 결론도 앞으로 몇 달,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 것입니다. 그분들은 그 결과를 지구 반대편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시작도 보지 못한 채 마냥 결과를 기다리는 것과, 절차의 시작을 눈앞에서 보고 난 뒤의 기다림은 다를 것입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