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0본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봄길> 중에서
15년 된 가게, 그리고 틈
그분은 열다섯 해를 그 자리에서 버텨오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라 보증금은 아버지가 마련해 주셨고, 임대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가게로 묵묵하게 한 자리를 지켜왔는데, 이제 문을 닫을 때가 되었습니다.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임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돈은 네가 아버지에게 빌린 거야. 나중에 네가 가게를 그만두면 알려달라고 했어. 네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현금으로 주겠다. 나는 너희 부자 사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아."
그분과 아버지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처음에는 작은 오해였습니다. 그런데, 제때에 그 감정을 풀지 않고 흘려보내다 보니 어느덧 왕래조차 끊길 정도로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있었습니다. 굳이 얼굴을 마주쳐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 보증금을 받으려고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니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임대차계약서에 적힌 임차인은 자신이었고, 15년 치 월세도 빠짐없이 직접 냈습니다. 아버지는 계약 당사자도 아니었는데, 보증금을 돌려받는 데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낸 사람과, 돌려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
임대차계약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을 권리는 계약서에 이름이 적힌 임차인에게 귀속됩니다. 실제로 그 돈을 누가 마련했느냐는 임대인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법원도 같은 입장인데, 보증금의 출처가 가족이나 제3자라 하더라도 임대인은 계약서상의 임차인에게 반환해야 하며, 그 돈이 누구로부터 나왔느냐는 임차인과 그 사람 사이의 내부 문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임대인이 '아버지 동석'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변제는 채무의 내용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임대인이 해야 할 일은 임차인 본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는 것, 그것뿐이며, 계약 어디에도 아버지의 동석을 요구할 근거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빌려주었다는 주장, 분쟁에 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임대인 측의 사정일 뿐이지, 임차인에게 불리한 조건을 일방적으로 부과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임대인이 정말 분쟁에 휘말리는 것이 두렵다면 법이 마련한 길이 있습니다. 법원에 변제공탁을 하면 되는데, 임차인 본인을 피공탁자로 하여 공탁하면 임대인은 보증금 반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처리됩니다. 즉, 임대인의 아버지 동석 조건부 제안은 법적으로 부적합하고, 그분은 그 조건을 거절하더라도 아무런 법적 불이익을 입지 않습니다.
내용증명, 보류하실래요?
사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내용증명 한 통 작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임대인에게 조건부 지급 제안은 법적 근거가 없으니 임차인 계좌로 이체하라고 통보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멈추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 사이의 갈등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고조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등을 돌린 관계가 아니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한 것이지 영영 못 볼 사이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대인 역시 악의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엉켜 있는 감정 사이에 자신이 끼는 것이 싫어서 나름의 방식으로 거리를 두려 한 것이었는데, 그 방식이 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과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였습니다.
법대로 하면, 종종 사람이 사라집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합니다. 협의의 여지가 남아있을 때,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조금씩 물러설 가능성이 있을 때는 그것을 먼저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법은 강력하지만, 법을 꺼내 드는 순간 관계는 대개 경직되고 상대방은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협상의 문이 좁아지고, 어쩔때는 완전히 닫혀버리기도 합니다. 이기고 나서 남는 것이 공허한 경우를 저는 몇 번이고 보아왔습니다.
그분에게는 이런 취지를 말씀드리며, 내용증명 발송을 잠깐 보류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냐고 넌지시 권유드렸습니다.
"아버지를 마주치는 게 편치는 않지만... 그냥 맞닥뜨려야겠네요."
관계를 살리는 일도 법률가의 일
법률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조항을 들이밀고, 어떤 절차를 밟고,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지, 그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옳은 것과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항상 같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법보다 한 걸음 앞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얽힌 감정을 풀고, 막힌 대화를 트고, 필요하다면 불편한 자리를 기꺼이 만드는 것입니다.
법은 도구입니다.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를 아는 것도 이 일의 일부입니다. 빠르게 갈등을 종결하는 것, 사람을 잃지 않는 것, 가능하다면 관계가 남는 것.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일하는 방식입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그분이 아버지를 마주하기로 하신 결심이, 내용증명 한 통보다 더 많은 것을 해결해 줄지도 모릅니다. 법은 권리를 지켜주지만, 관계는 사람이 직접 움직여야만 살아납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가 되겠지만, 그 자리를 통과하고 나면 조금은 더 가벼워지실 수 있기를, 보증금도 되찾고 오래된 감정의 무게도 조금은 내려놓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법대로 하기 전에, 먼저 사람과 이야기해 보는 것. 그것이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