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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3본문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 정현종, <경청> 중에서
한 건물의 통임대인
평생을 성실하게 모은 돈으로 건물을 하나 마련한 분이었습니다. 삼 층짜리 작은 건물이었고, 마침 건물 전체를 통째로 쓰겠다는 임차인이 나타났습니다. 층마다 다른 세입자를 들여 하나하나 관리하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통임대는 더없이 반가운 제안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더 따져볼 것도 없이 계약을 서둘렀습니다. 임대차 기간도 이 년이 아닌 사 년으로 넉넉히 정해졌습니다. 그분은 이제 당분간은 걱정할 일이 없겠다며 마음을 놓았습니다.
어긋나기 시작한 날
그 안도가 여섯 달을 넘기던 무렵이었습니다. 늘 제날짜에 들어오던 차임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며칠 늦어지는 것이겠거니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도 입금도, 연락도 없었습니다. 사정이 있겠거니 기다리는 사이 다음 달 차임 날짜가 돌아왔고, 그마저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연락을 하면 곧 드리겠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자 더 불안해졌습니다. 곧 드리겠다는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달도, 또 그다음 달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임차인은 보증금이 남아 있는 동안은 차임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사이 그분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임대료를 부탁드린다는 말, 그것도 늘 조심스러운 어조였습니다.
유독 뒷전이었던 이유
그런데 그 임차인이 다른 채권자들에게는 돈을 꼬박꼬박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채권자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거칠게 몰아붙였다고 했습니다. 겁박에 가까운 언행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그분은 언제나 정중했습니다. 성정상 언성을 높이는 일은 그분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중함의 대가는 뒷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얌전한 사람에게는 나중에 갚아도 된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세상 이치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유독 이 임차인이 그러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중하게 요청하는 채권자와 거칠게 다그치는 채권자를 놓고 순서를 정한다면 결국 뒤로 밀리는 쪽은 정해져 있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보증금이 조금씩 줄어들어 바닥을 보일 즈음,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사건을 맡게 된 것이 그때였습니다. 이미 여덟 달치 차임이 밀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망설임
어렵게 저를 찾아오셨지만, 법적 절차로 나아가는 일은 쉽게 결심이 서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평생 소송을 해본 적도, 당한 적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법원을 거쳐 서류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관계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일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정당한 권리를 요청하면서도 늘 미안해하셨는데, 여덟 달이나 밀린 돈을 한꺼번에 갚아야 한다면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지부터 헤아리셨습니다. 용기를 내어 법대로 하겠다는 말을 전해도, 돌아오는 답은 알아서 하라는 한마디뿐이었습니다.
그분의 어떤 말도 임차인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미 그분의 성정을 상대방이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해주면 고마운 줄 알고 더 잘해야 마땅할 텐데, 어째서 반대로 흘러가는 것인지 지켜보는 저로서도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이 보내온 문자들을 보면, 독촉이라기보다는 부탁에 가까웠습니다. “이번 달에는 주실 수 있나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 문장들이었습니다.
대리인의 자리
이제는 다른 태도를 보여줄 때였습니다. 그분이 나서지 못하신다면, 제가 나서야 할 차례였습니다. 애초에 변호사라는 대리인을 두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당사자 대 당사자로 마주하면 그간의 감정과 관계가 얽혀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대리인은 그 입장을 대신 전하는 자리이기에 한결 수월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정하고도, 실제로 서류를 접수하기까지는 또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 차례 권해드렸지만 그분은 마지막까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는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서류를 접수하기까지 두 달이 더 흘렀고, 차임이 연체된 지 열 달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가압류와 소송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돌변한 태도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전까지 그분을 대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임차인은 몸을 낮추고 또 낮추었습니다. 열 달 동안 밀렸던 차임 중 여덟 달치를 한꺼번에 갚았습니다. 그토록 어렵다고 하던 형편에서 그 돈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정말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독촉하지 않는 상대에게만 돈을 미루어 온 것인지는 지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빠르게 갚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침 큰 대출을 진행하던 중이었는데, 가압류 때문에 그 건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절차에 따라 정당하게 취한 조치가 정확히 급소를 짚은 셈입니다. 그토록 미루던 손이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간의 시간을 더 허탈하게 만들었습니다.
임차인은 제게 가압류 결정문을 받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제 의뢰인은 열 달 내내 머릿속이 하얗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 긴 시간 고통받은 것은 저희 쪽이었는데, 이제 와 한 번 봐 달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밀린 차임의 대부분을 받아내며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남은 차임과 앞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별도의 확약을 받아,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매듭을 지었습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이 사건에서 변호사로서의 소임은 다한 셈이지만, 마음 한편은 씁쓸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해를 끼치지는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왜 칼을 들이대야만 태도가 바뀔까? 말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손에 왜 기어이 칼자루를 쥐게 만들까?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또한, 정중함과 배려는 관계를 지키는 미덕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나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 신호로 읽히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