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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8-13본문
삶을 유보하지 말아야 한다
옮은 건 유보하지 말아야 한다
- 박노해, <유보> 중에서
조각난 이야기로 시작된
그분을 처음 소개해 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제가 아는 분인데요, 임대인 측에서 그동안 관리비를 이중으로 받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그게 그분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 임차인들이 다 그랬대요."
상담은 늘 이렇게 조각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전해 들은 몇 마디만으로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더 들어보아야 합니다. 찾아오시는 분들은 한결같이 "간단한 건데요"라는 말로 운을 떼시지만, 변호사를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단순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무게도, 당사자에게 미치는 영향도 가볍지 않습니다. 이 사건도 그러했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는 짤막했지만, 그 안에는 이미 여러 겹의 사정이 포개어져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건물의 임차인 전체와 얽힌 문제일 수도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확인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임차인이 놓친 것
그분은 사업을 시작하며 건물을 임차했습니다. 매물을 고를 때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은 역시 차임입니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부터 매달 나가야 할 돈이니까요. 그다음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관리비이지만, 통상 관리비는 차임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고, 대개는 빌린 공간을 쓰는 데 드는 실비 성격에 가깝습니다. 별도의 관리사무소가 있어 수수료를 부담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 비중이 차임이나 실비를 넘어서는 일은 드뭅니다.
그래서 그분 역시 계약서의 관리비 항목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쓰는 공간이 정확한지, 차임이 얼마인지가 그분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었습니다. 계약서 여러 장을 앞뒤로 넘겨 가며 확인한 것도 결국 그 두 가지였습니다. 관리비는 어느 계약서에나 으레 있는 항목이려니 하고 넘겼던 것입니다.
뒤늦게 드러난 항목
문제는 계약서에 적힌 '정액관리비'였습니다. 계약 초기에 임대인으로부터 두 달간 렌트프리를 받았는데, 그 두 달 동안은 정액관리비가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그분이 이 항목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한 것은 계약 개시로부터 두 달이 지난 뒤였습니다.
관리비 명목으로 청구가 되니 일단 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 정액관리비는 월초에 차임과 함께 부과되고, 실비 관리비는 월말에 따로 부과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관리비인데 부과 시기도, 방식도 서로 달랐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마침 장사가 잘되던 시기라 미처 챙길 여력이 없었습니다.
숫자가 말해준 것
매출이 뜸해지면서 고정비의 무게가 새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항목을 하나씩 짚어보니, 정액관리비만 차임의 삼분의 일 수준이었습니다. 실비 관리비 역시 차임의 삼분의 일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를 합치면 관리비로 나가는 돈이 차임의 삼분의 이에 이르는 셈이었습니다. 매달 내는 돈의 절반 이상이 사실상 관리비였던 것입니다.
정작 계약서에는 정액관리비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저 '정액관리비'라고만 적혀 있을 뿐, 그것이 어떤 항목에 대한 것인지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임대인에게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거 우리 직원들 인건비다"
계속된 독촉 끝에 돌아온 대답은 ‘임대인 회사 직원 인건비’라는 한 마디였습니다. 관리 인력의 인건비가 관리비 항목에 포함되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정액관리비 전부가 그 용도로만 쓰인다는 설명은 석연치 않았습니다. 인건비만으로 차임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금액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정액관리비 명목으로 사실상 실비 성격의 비용도 부과되고 있었다면, 실비 관리비와 중복해서 부담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눈 다른 임차인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석연치 않은 지점들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계약은 존중하되, 구성은 따져야 합니다
계약은 당사자 사이의 합의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정액관리비'라는 약정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조항 자체를 무효라 할 수는 없습니다. 임차인이 그 조항에 서명한 이상, 정액으로 관리비를 낸다는 합의 자체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명목상 하나의 항목이라 해도, 실제로는 실비 항목과 중복되거나 근거 없이 부풀려진 부분이 있다면, 그 실체를 따져 묻는 것은 정당한 권리입니다. 계약의 형식이 내용까지 항상 정당화해 주지는 않습니다. 정액이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계약서 밖에서 밝혀야 할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소개해 준 지인의 몇 마디로 시작된 이야기는, 렌트프리 뒤에 숨어 있던 항목 하나로, 다시 차임의 삼분의 이에 달하는 숫자로 이어졌습니다. 조각들을 하나씩 맞추어야 비로소 사건의 전체 그림이 드러나는 것은, 이 일을 오래 해도 매번 새삼스럽습니다. "간단한 건데요"라는 첫마디와, 마주하고 보니 결코 간단하지 않았던 사정 사이의 거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된 답을 피해 온 임대인이, 법원에서는 어떤 대답을 들고 나올지 지켜볼 일입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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