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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0본문
옥수숫대는
땅바닥에서 서너 마디까지
뿌리를 내린다
땅에 닿지 못할 헛발일지라도
길게 발가락을 들이민다
- 이정록, <희망의 거처> 중에서
판결문 한 장이면 바뀔 줄 알았습니다
6개월이었습니다. 독촉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찾아가기도 하고,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던 날들. 그분은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이 의미 없다고 판단한 순간, 법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소송을 제기하고 또 6개월. 드디어 판결이 나왔고 결과는 예상대로 전부승소였습니다. 그러나, 판결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채무자가 스스로 갚지 않는 한, 강제로 받아내는 일은 오롯이 채권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2억을 받으려면 4천만 원이 먼저 필요하다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지인들이 조언을 하였습니다. 상대방 재산을 알고 있다면 꼭 가압류를 병행하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가압류를 신청하려면 현금공탁이 필요합니다. 공탁금은 판결 이후에 돌려받을 수 있는 돈이지만, 청구금액의 20% 남짓을 미리 법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2억 원을 받아내기 위해 먼저 4천만 원을 묶어두어야 했습니다. 사업을 운영하는 그분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분은 고민 끝에 가압류는 하지 않기로 하였고, 불안함과 초조함 가운데 판결을 기다렸습니다. 승소 판결문을 손에 넣자마자 곧바로 채무자의 계좌를 압류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채무자는 이미 통장을 바꿔버린 뒤였습니다.
전국 1,286개 중 어딘가에
채권자는 그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여러 곳에서 돈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던 채무자였으니, 계좌를 바꾼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어렵게 새로 파악한 정보는 '지역농축협'에 계좌가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전국 지역농축협은 1,286개입니다. 그중 어느 곳인지를 특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긴 시간을 써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주저앉아야 하는 것인지. 그분은 이미 많이 지쳐있었습니다.
채무자의 재산을 알아내는 방법
저는 그분께 세 가지 제도를 설명드렸습니다. 재산명시, 채무불이행자명부 등재, 그리고 재산조회입니다.
재산명시는, 법원이 채무자에게 "당신이 가진 재산을 목록으로 제출하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동산, 예금, 자동차, 임대차보증금, 급여, 보험계약, 주식 등 현재 재산만이 아닙니다. 최근의 재산 처분 내역, 친족에게 넘긴 재산, 무상으로 증여한 내역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거짓으로 제출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고, 재산명시기일에 출석을 거부하면 20일간 감치 될 수 있습니다.
채무불이행자명부 등재는, 판결이 확정된 뒤 6개월이 지나도록 변제하지 않는 채무자를 공적 명부에 올리는 제도입니다. 금융거래에 불이익이 생기고, 신용도가 하락하며, 사회적인 압박이 따릅니다. 개인 채무자에게는 상당한 실질적 부담이 됩니다.
재산조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채무자가 스스로 신고하는 것이 아니라, 법원이 은행, 증권사, 보험사, 국세청, 국민연금 등 각 기관에 직접 조회합니다. 예금, 급여, 보험해약환급금, 부동산, 차량 등이 확인되면 곧바로 압류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재산을 숨기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설명을 다 듣고 나서 그분이 물으셨습니다. "재산명시 신청서가 오면 미리 계좌를 바꿔버리면 그만 아닌가요?"
오랜 시간 싸워온 분이었습니다.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재산명시 신청서를 받은 뒤 계좌를 옮기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50만 원 미만으로 잔액을 비워두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명시에서 제출해야 하는 목록은 단순히 예금 계좌 하나가 아닙니다. 부동산, 자동차, 보험계약, 정기적인 수입과 각종 동산 재산 등 그 전체가 드러납니다. 예금을 숨긴다 해도, 다른 재산의 흔적은 남습니다.
대부분 돈을 받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정말로 재산이 없는 경우, 혹은 재산이 있지만 어떻게든 빼돌려 채권자가 결국 포기하도록 만드는 경우. 이 사안은 전자가 아닌 것 같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습니다.
선택은 그분의 몫입니다
저는 그분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았는지 압니다. 시간도, 돈도, 마음도. 그 긴 시간을 버텨온 분이 바로 앞에서 멈추는 것이 저는 더 아쉬웠나 봅니다.
그래도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택은 그분의 것이고, 저는 그 결정을 존중합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어떤 권리는 쉽게 손에 쥐어집니다. 서류 한 장으로 정리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권리는 그 길이 참 멀기도 합니다. 이기고 나서도, 판결문을 받고 나서도 아직 끝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까요.
그분이 겪은 것이 꼭 그랬습니다. 6개월을 기다리고, 6개월을 싸우고, 이겼는데도 돈은 없었습니다. 그 답답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직 쓸 수 있는 수단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써보는 것과 쓰지 않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이 그 선택을 하시기를, 조용히 바라고 있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