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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0본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이성부, <봄> 중에서
그저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
상대방은 그분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업종에서 각자 회사를 이끌며 서로의 사정을 손금 보듯 알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니 어느 날 상대방이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선뜻 빌려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업하는 사람치고 여유 현금을 여분으로 쌓아두는 이가 있을까요? 망설임은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돕기로 했습니다. 다만, 회사 돈을 빌려주는 일이었으므로 형식은 갖춰야 했습니다. 금전소비대차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안에는 으레 그렇듯 연대보증 조항이 담겼습니다. 회사가 대여금을 갚지 못할 경우 대표이사가 개인으로 연대보증 책임을 진다는 내용입니다. 1장짜리 간이 계약서이기에 두 사람 모두 그 내용을 알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상대방은 인적사항란에 직접 자필로 기재한 뒤 스캔본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왔습니다. 계약서 수정사항이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몇 분 후 다시 자필로 기재한 스캔본이 도착했습니다.
발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상대방은 약속한 날짜에 돈을 변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1년을 기다리다가 상대방 회사와 상대방에게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계약서에 회사의 서명란만 존재하고, 개인의 연대보증란은 없다는 점을 파고들어 개인책임을 회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첫째, 계약서는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제공한 것이므로 자신은 연대보증 조항의 존재와 내용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둘째, 설령 조항이 있더라도 연대보증인란이 없는 이상 법이 요구하는 형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계약서에 기재된 서명은 자신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회사 직원이 한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두 번째 주장은 법적으로 따져볼 여지가 있습니다. 연대보증의 효력이 생기려면 보증인의 서명 또는 기명날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법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와 세 번째 주장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장짜리 7개 조항의 내용을 인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오리발을 내미는 거였고, 계약 당시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습니다. 직접 날인을 요청하자 상대방이 곧바로 알겠다 하고 몇 분 만에 스캔본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이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한 부정은 오히려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정황은 쌓이고, 거짓은 덧붙여지고
상대방 직원이 기재했다는 주장에 맞서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직원이 누구냐고. 상대방은 직원이 여러 명이라 특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알기로 상대방 사무실에는 직원이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직원과의 통화에서 자신은 계약서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내용의 녹취가 확보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다른 카드를 꺼냈습니다. 계약서가 작성된 날 지방 출장 중이었다며 사진을 제출했습니다. 스키장에서 스키복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기록된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고, 계약서가 작성된 시간은 오후 3시경이었습니다. 스키장과 상대방 사무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내비게이션 자료를 제출하였습니다. 새벽에 스키를 탔다고 해서 오후에 사무실에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수치로 내밀었습니다.
상대방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계약서에 기재된 필적이 평소 자신의 필적과 다르다며 다른 기관에 제출했던 자필 서약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필적감정이 행해진다면 적극적으로 성실히 임하겠다고 호언장담을 쏟아부었습니다.
필적감정일에 흔들린 태도
우리가 필적감정이라는 절차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망설여졌던 것은 이로 인하여 지나 보내게 될 시간과 돈이었습니다. 분명 상대방이 직접 자필로 기재한 것이 맞는데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정황증거들을 내밀어도 언변술로 빠져나가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필적감정을 신청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적극 협조하겠다던 상대방은 정해진 필적감정일에 일정을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재판은 그렇게 또 늦어졌습니다. 다시 잡힌 감정일에 마지못해 출석한 것으로 보이는 상대방은 감정인이 동일한 글자를 30번 쓰도록 요구하자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30번 써야 하는 법적 근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정자체와 흘림체를 각각 쓰라고 하자 자신은 정자체와 흘림체가 같다며 굳이 두 가지를 달리 쓸 이유가 없다고 버텼습니다. 수십 년 경력의 감정인이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30번이 아닌 20번으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감정 대상 문서에 기재된 문자 수에 따라 감정인은 당사자에게 일정 분량의 필적을 직접 써줄 것을 요구합니다. 문서감정 규정에 따르면, ‘20자 이내의 문서일 경우 10매 이상, 20자 이상의 문서일 경우 5매 이상을 기준으로 하되 가능한 한 충분한 분량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감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감정인이 30번을 쓰도록 요구하는 것은 그 기준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문가의 판단입니다.
그렇게 순탄치 않은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넉 달이 흘렀습니다.
결과는 동일필적
결과는 명료했습니다. '판단불가'도 '유사하다'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서에는 분명히 '동일필적'이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소송 초기부터 일관되게 자신의 필적이 아니라고 주장해 온 상대방의 말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대표이사라서 했다던 그 서명이 개인의 자필임이 인정된 이상, 개인 연대보증의 효력이 인정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만약,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억지스럽게 밀어붙이고 있다면 그 주장을 법적으로 검증할 절차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시가감정, 공사비등 감정, 측량감정, 신체감정, 진료기록감정, 문서등 감정.. 법정에는 진술 이외에도 사실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절차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그 절차를 활용하는 것이 때로는 유익한 길이 됩니다.
거짓말은 결국 들통이 납니다.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마지막 변론기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