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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9본문
나에게 손쉽게 찾아오는 것들
연달아 맞춰서 추천되는 것들
그것들을 조심하라
- 박노해, <진실은 찾아오라 한다> 중에서
20장짜리 계약서, 그 꼼꼼함의 이면
그분은 대단지에 새로 개발된 상가의 임차인이었습니다. 상권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대규모 단지가 들어서는 자리인 만큼 유동인구도, 수요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행사도 적극적으로 입점을 권유했습니다. 좋은 자리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분은 서둘러 계약을 진행했습니다.
관리가 잘 되는 곳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약서부터가 그랬습니다. 보통 상가임대차계약서라고 하면 한 장 짜리 표준양식이 전부인 경우가 많은데, 이곳 계약서는 무려 20장에 달했습니다. 그만큼 꼼꼼하게 관리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처음 몇 달, 그리고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차임
계약을 체결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성황리에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권은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매출은 정체되었고, 인건비와 재료비, 임차료, 각종 공과금을 합친 운영비를 감당하기 벅찬 시점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차임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상가임차인이 3기의 차임액에 이르도록 연체하면 임대인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기에 3기 만은 밀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막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남는 보증금이 없다는 통보, 그리고 낯선 서류
결국 3기 차임 연체가 발생하던 바로 그날, 임대인은 기다렸다는 듯 계약해지를 통보했습니다. 보증금에서 연체 차임과 연체이자, 관리비, 손해배상비용, 원상회복비 등을 모두 공제하고 나면 돌려받을 돈은커녕 오히려 더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반환받을 보증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버텼습니다. 그러자 임대인이 꺼내 든 것이 건물명도를 위한 제소전화해조서였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리고 임대인은 그 화해조서를 근거로 강제집행을 신청해, 결국 상가를 강제로 명도 시켰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선임된 변호사
무언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임대인이 알려준 사건번호로 법원에서 화해조서를 발급받아 확인해 보니, 그분이 소송대리인을 선임하여 제소전화해가 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무려 1년 6개월 전에요.
그분은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변호사를 만난 적도, 변호사에게 보수를 지급한 적도 없었습니다. 화해조서 조항에 관해 변호사로부터 설명을 들은 적도, 화해조서가 성립된 후 그 등본을 받아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화해조서가 성립될 수 있었을까요?
제소전화해 사건에 제출된 소송위임장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법원에 문의해 보았습니다. 돌아온 답은 이랬습니다. 소송위임장에는 그분의 인감도장이 날인되어 있었고, 인감증명서까지 첨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분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계약서 체결당일에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임대인은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를 요청했고, 그분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를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임대인은 그분의 인감도장을 가지고 여러 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아마 그 서류들 중에 문제의 제소전화해 소송위임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에 달하던 임대차계약서에는 이런 조항이 있었습니다. "임대인이 제소전화해를 요구하는 경우 임차인은 이에 응하여야 한다." 임대인은 아마도 이 조항을 근거로, 임의로 소송위임장을 작성하고 날인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사문서위조에 해당할 소지가 큽니다.
응할 의무가 있다고 해서, 내용까지 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약서에 제소전화해에 응하여야 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다고 해서, 임대인이 임의로 일방적으로 제소전화해의 성립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소전화해가 성립하려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통상 임대차계약서 내용과 동일한 조건으로 화해조서가 작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사건에서도 실제 화해조서에는 계약서보다 그분에게 불리한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소전화해 사건에서 소송대리인을 선임할 권한은 당연히 그 당사자, 즉 그분에게 귀속된다는 점입니다. 우리 민사소송법은 이렇게 규정합니다. "당사자는 제소전화해를 위하여 대리인을 선임하는 권리를 상대방에게 위임할 수 없다."
이 조항의 입법 취지는 명확합니다. 채권자가 채무자로부터 대리인 선임에 관한 백지위임장을 미리 받아두고, 이를 이용해 채권자 스스로 채무자의 대리인을 선임하여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의 제소전화해를 이루어내는 것, 즉 제소전화해 제도가 채권자의 탈법행위를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남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저는 즉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이 사건을 들여다볼수록 상당히 강한 합리적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임차인측 변호사, 임대인측 변호사, 그리고 임대인 각각에게 제소전화해 성립 경위를 밝혀달라는 내용증명을 발송했습니다. 답변은 기다려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답변과 상관없이, 제소전화해를 취소하기 위한 준재심의 소는 이미 제기해 두었습니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을까요. 자신이 당사자인 사건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진 결정이 내려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즉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