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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10-26본문
54. 빌린 적 없는 돈인데, 압류를 당했습니다. - 이의신청 없이 확정된 지급명령, 그 후의 절차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냉장고에 붙은 종이
어느 가을날, 집행관이 그분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과 텔레비전에 차례로 압류 표시가 붙었습니다. 가족들이 매일 열고 닫는 냉장고였습니다. 집행관은 '알리는 말씀'이라는 종이 한 장을 건네고 돌아갔습니다. 거기에는 채권자의 이름과 함께, 그분이 오래전에 받았던 지급명령의 사건번호가 적혀 있었습니다.
압류 표시가 붙은 물건은 그 뒤에도 집 안에서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세탁기를 돌립니다. 다만 언제 매각 날짜가 잡힐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날부터 그 물건들 위에 함께 붙어 있게 됩니다.
그분은 그 사건번호를 법원 사이트에서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오래전에 잊고 지낸 사건 옆에는 '확정'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에게 상담을 신청하셨습니다.
두 해 전의 그 서류
이야기는 두 해 가까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분은 법원에서 지급명령 정본을 받았습니다. 상대방이 그분에게 개인적으로 수천만 원을 빌려주었으니 갚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기억하는 거래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빌린 적 없는 돈이었고, 상대방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서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분은 상대방에게 무엇을 근거로 하는 요구인지 밝혀 달라고 했고, 법률 검토가 필요하다는 뜻도 전해 둔 터였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무렵 그분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쉼 없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법원에 무언가를 써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일은 자꾸 뒤로 밀렸습니다. 그렇게 날짜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서류는 조용히 확정되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분도 그 일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 사이 원금에는 지연손해금이 붙어, 집행관이 들고 온 청구금액은 처음 지급명령에 적힌 금액보다 훨씬 커져 있었습니다.
지급명령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급명령은 법원이 채권자가 낸 서류만 보고 내리는 명령입니다. 상대방을 불러 이야기를 듣는 재판을 거치지 않고, 주장이 사실인지도 따져 보지 않습니다.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들어, 돈을 받으려는 쪽에서 자주 쓰는 절차입니다.
그래서 받는 사람에게는 이의 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지급명령을 송달받은 날부터 2주 안에 이의신청을 하면, 그 사건은 다시 소송으로 넘어가 다툴 수 있습니다. 이의신청서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왜 다투는지 자세한 이유를 적지 않아도 되고, 단지 이의가 있다는 뜻을 기한 안에 법원에 알리면 됩니다.
하지만 그 2주가 지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받는 사람의 침묵은 다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지급명령은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을 가집니다. 채권자는 그 정본만 들고 곧바로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정된 권리는 10년 동안 살아 있습니다.
한꺼번에 해야 하는 일들
다행히 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확정된 지급명령에 대해서는 '청구이의의 소'를 제기해, 처음부터 그런 채권이 없었다는 점을 다시 다툴 수 있습니다.
다만 소를 제기한다고 해서 집행이 저절로 멈추지는 않습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압류된 물건은 매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구이의의 소와 함께 강제집행정지신청을 따로 해야 합니다. 신청만으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법원이 정지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결정문을 집행관에게 제출해야 비로소 집행이 멈춥니다. 법원은 정지의 조건으로 담보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압류도 따로 살펴야 했습니다. 상대방의 권리가 맞든 틀리든, 가족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까지 가져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위한 절차가 압류금지물 범위변경신청입니다. 집행권원이 유효한지와는 별개로, 생활을 지키기 위한 신청입니다. 그분은 저를 찾아오기 전에 이 신청을 혼자 접수해 두셨습니다.
소장을 쓰고, 정지신청서를 쓰고, 이미 들어간 신청을 다시 살폈습니다. 두 해 전이었다면 이의신청서 한 장으로 끝낼 수 있었던 일이, 지금은 여러 사건이 되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지켜줄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을 겪는 분이 그분만은 아닙니다. 지급명령이 확정되고 집행관이 다녀간 뒤에야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여겼던 분도, 먹고사는 일에 밀려 미뤄 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권원이 주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한번 확정된 서류는 그 뒤로 사실이 무엇이었는지와 상관없이 움직입니다. 그분은 상대방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분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가만히 있는 사람을 대신 지켜줄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의 권리는 스스로 나서서 지켜야 합니다. 그것도 알맞은 때에 말입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청구이의의 소와 강제집행정지신청을 접수하면서, 두 해 전 그 서류가 그분의 손에 들려 있던 날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한 장의 이의신청서를 보냈더라면, 지금 이 많은 일을 급하게 처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혼자 써서 낸 신청서를 읽으며, 저는 이분이 이제 가만히 있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마음이 있었기에 저도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법원에서 온 봉투를 서랍 속에 넣어 두신 분이 있다면, 오늘 꺼내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말이 안 되는 주장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고, 그 말을 들어줄 시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오늘의 접수가 너무 늦은 때가 아니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