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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7-21본문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 박노해, <다시> 중에서
오랜만의 전화
핸드폰에 새언니의 이름이 뜬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수신을 눌렀는데, 전화기 너머에서는 다급함이 묻어났습니다. 새언니의 아들- 즉, 제게는 5촌 조카입니다- 이 군대 선임에게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액수를 물어보니 581만 원이라고 합니다.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20대 초반의 조카에게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상대방은 40만 원, 50만 원, 100만 원… 이렇게 열 번에 걸쳐, 무려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또, 집요하게 돈을 빌려갔습니다. 그 사이 갚은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매번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했고, 이자까지 더해서 금방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은('믿고 싶었던'이 맞겠죠) 조카는 계속 지갑을 열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일이죠. 처음, 두 번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세 번째, 네 번째로 넘어가면서 단 한 번도 갚지 않는 상대에게 계속 돈을 건넨다는 것이 말입니다. “왜 그랬냐?”라고 이제 와서 추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사태의 원인파악보다는 해결로 들어가야 할 때였습니다.
새언니는 상대방이 온갖 이유를 대며 계속 돈을 요구했던 모습이 너무 괘씸해서, 그리고 갚을 생각이 없는 그 뻔뻔한 태도 때문에 사기죄로 형사고소를 했다고 했습니다.
형사와 별개의 문제
고소인 조사당일에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피고소인에게 합의여부를 물어는 보겠지만, 만약 합의가 성사되지 않는다면 형사와는 별개로 민사적 해결이 필요하다고요.
태어나서 소송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조카는 막막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서류 양식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간 법원 민원실에서는 "대여금 소송은 증거가 명백하고 간단하니 혼자서 하셔도 됩니다"라고 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더 막막해졌습니다. 서류 양식이 손에 쥐어졌어도 어디서부터 채워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법원 직원에게는 간단한 일이 왜 이렇게 어렵게만 느껴지는지, 그래서 보다 못한 새언니가 오랜만에 저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아가씨가 변호사인데"라는 말과 함께요.
대리인이 아니라 안내자로
사실 대여금 소송은 증거만 명백하다면 어렵지 않게 제기할 수 있는 소송입니다. 계좌이체 내역이나 문자메시지처럼 돈을 빌려주고 갚기로 한 정황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면, 다툼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소송보다 절차가 단순하고 비용도 10분의 1 정도인 지급명령을 신청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사안에 변호사를 선임하면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습니다. 승소하더라도 손에 남는 게 거의 없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조카의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81만 원을 받아내기 위해 변호사 비용으로 그중 상당액을 쓰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카에게 직접 나홀로소송의 절차와 방법을 알려주기로 했습니다. 조카는 전라남도 광주에, 저는 서울에 있어 얼굴을 마주하기는 어려웠기에 화상회의 링크를 보냈습니다. 조카가 전자소송포털에 접속해 화면을 공유해 주면,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하는지 하나씩 짚어주기로 했습니다.
15분 만에 끝난 일
사건유형을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대여금이라는 사건명을 고르고, 관할법원은 조카의 주소지 법원으로 선택한 후 소가(청구하는 금액)를 입력하였습니다. 청구취지 문구는 전자소송포털 시스템에서 제시하는 예시 중 이 사안에 맞는 것을 선택한 후 구체적인 숫자를 수정하였고, 청구원인은 미리 정리해 둔 첨부파일을 업로드하도록 하였습니다. 계좌이체 내역을 정리한 자료와 문자메시지 캡처본을 입증서류로 첨부했습니다. 인지대와 송달료를 전자결제로 납부하고, 마지막으로 소장을 제출했습니다.
이 모든 절차를 마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5분이었습니다.
물론 청구원인을 정리하고 그에 맞는 증거를 배열하는 작업은 제가 미리 해 두었습니다. 조카는 제가 전달한 자료를 전자소송포털에 그대로 첨부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여금 청구처럼 증거가 명백한 사건이라면 나홀로소송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기는 합니다.
화면 너머로 남긴 기록
제가 브런치에 법률상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이유는, 나에게 벌어진 사건이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유사한 상황에 대한 예방책이나 대처 방안을 나누고 싶기도 합니다.
조카에게 나홀로소송을 안내한 그날의 화상회의는 조카의 동의를 받고 처음부터 끝까지 녹화했습니다. 실제 진행된 그대로를 편집 없이(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담은 것이니 편집을 할 필요가 없지요) 유튜브에 올릴 예정입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변호사의 마음에서
저는 조카의 소송을 대신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소장을 제가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 어쩌면 더 빨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 아이의 길이 되어주기보다, 그 아이가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방향을 짚어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대신해 주는 도움은 그 순간에는 편할지 몰라도,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는 다시 막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송을 또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만 되던가요.
581만 원이 조카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듯, 이번 경험도 작은 경험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 조카는 이번 일을 통해, 돈, 그 이상의 값진 것을 배웠을 겁니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낸 경험, 그것이 앞으로 조카가 살아가면서 몇 번이고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자산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