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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8-28본문
일을 할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 박노해, <3단> 중에서
그날 오후
그분은 법무법인의 명의의 내용증명 회신문을 받은 그날 오후 세 시, 바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루도 지나지 않고 곧장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리신 걸 보면, 그만큼 이 일을 빨리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회신문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문서 하나가 회원들과 헬스장 사이에 몇 달째 이어진 실랑이에 마침표를 찍기는커녕,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그분은 헬스장의 PT 프로그램을 등록한 회원이었고, 자신을 포함한 회원 열두 명을 대표해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나선 분이었습니다. 계약금액과 잔여 회차는 회원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오십만 원, 누군가는 이백만 원 가까이였습니다. 피해금액은 모두 달랐지만, 사정만큼은 똑같았습니다. PT 수업이 어느 날 갑자기 끊겼고, 환불을 요구했지만 헬스장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저는 ‘1. 굳게 닫힌 헬스장, 그대로 둘 수 없다’라는 글에서 갑작스러운 헬스장 폐업으로 회원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듯, 헬스장 관련 분쟁은 유독 피해가 한 사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계약이 표준화되어 있고 회원 수가 많다 보니, 문제가 생기면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같은 구조의 피해를 입습니다.
멈춘 수업, 그리고 회원들이 보낸 내용증명
발단은 담당 트레이너의 퇴사였습니다. 헬스장 측은 트레이너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그날 이후로 회원들의 PT 수업은 그대로 멈췄습니다. 대체 트레이너 배정도, 환불 안내도 없이 시간만 흘렀습니다.
회원들은 계약해지와 잔여 대금 환급을 요청하였습니다. 헬스장 측은 알아보고 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답변을 미루면서 연락을 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회원들은 헬스장 측에 정식으로 내용증명을 보냈습니다. 얼마 후 도착한 것은 환불하겠다는 답변이 아니라, 법무법인 명의의 내용증명 회신이었습니다.
법무법인 명의로 온 회신, 그러나
회신문의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트레이너가 문제를 일으켜 퇴사한 것이니 헬스장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 그리고 가입 당시 서명한 환불 규정에 따르면 이미 수강한 회차를 정상가로 계산할 경우 돌려줄 돈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법무법인 명의의 이런 문서를 받아 보신 분들은 대체로 겁부터 먹습니다. 전문적인 문구와 단호한 어조 앞에서 위축되게 되지요. 그러나 변호사 명의의 문서라고 해서 그 안의 주장까지 당연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PT처럼 일정 기간 계속해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계약은, 트레이너 쪽 사정이 어땠는지와 무관하게 회원이 원할 때 해지하고 남은 부분을 정산받을 수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헬스장이 그 과정에서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위약금 공제를 다툴 때 문제 될 뿐, 애초에 환불을 거부할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소송보다 협상을 먼저 권한 이유
그분은 처음부터 바로 소송을 원하셨습니다. 회신문을 읽고 나니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소송은 옳고 그름을 가장 확실하게 가려주지만, 가장 빠른 길인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열두 명 각자의 사정과 금액, 상대방이 이미 인정한 부분과 다투고 있는 부분, 걸리는 시간과 비용까지 함께 놓고 보아야 어느 길이 진짜 지름길인지가 보입니다. 이 사건은 그 여러 갈래를 따져본 결과, 협상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반박을 하나하나 짚어 다시 정리한 내용증명을 한 차례 더 보내, 협상의 문을 열어두는 쪽을 권해드렸습니다. 이쪽 주장이 옳다는 확신이 있는 이상, 협상으로 더 빨리 그리고 더 적은 비용으로 같은 결과에 이를 여지가 있었습니다. 소송은 그래도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분도 본업이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이 일 말고도 본업이 있었습니다. 열두 명의 자료를 취합하고, 법률 용어로 된 회신문을 읽어내고, 상대방과 주고받을 말을 매번 가다듬는 일을 본업과 병행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변호사에게 위임하는 것이 여러모로 적절합니다. 열두 명의 입장을 하나로 정리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협상과 소송 중 무엇이 유리한지 판단하는 일은 애초에 회원들의 대표 한 사람이 짊어질 몫이 아니라, 그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대표가 해야 할 일은 회원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것까지이고, 그 목소리를 상대방이 반박하기 어려운 형태로 다듬는 일은 저의 몫이었습니다.
변호사의 마음에서
변호사 이름으로 된 문서 한 장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문서를 보낸 쪽도, 받은 쪽도 결국은 같은 법 아래에 있습니다. 상대방이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사실이 이쪽 주장을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이쪽에도 그 문서를 정확히 읽어내고 되받아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그날 오후 망설이지 않고 저를 찾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유노이아 법률사무소, 장유미 변호사입니다.
법과 삶, 그리고 문학이 만나는 자리
한 편의 시와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유노이아의 법률 에세이가 시작됩니다